사이버사이코에 대한 단상

#essay #ai

Claude Code가 쓴 저격 글

올해 초엔 국내 AI 업계에서 꽤 시끄러운 논쟁이 있었다. U사의 LLM 모델이 독자 개발이 아니라는 의혹을 S사가 공개적으로 제기한 사건이다.

당시 나는 AI Agent를 적극적으로 쓴 지 얼마 안 된 때였으며 개발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해 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건 느끼는데, 그 변화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불안 같은 것. 그런 와중에 터진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건, 의혹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저격 글이 누가 봐도 AI가 쓴 글이었다는 점이다.

회사를 대표해서 나온 공적인 문서가, 문체도 구성도 딱 봐도 AI Agent가 쓴 거였다. 원문은 삭제됐지만 당시 정리된 레퍼런스가 남아 있다.

회사의 공식 입장으로 의혹을 제기하려면 충분한 검토와 검증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AI가 썼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이 자신 있게 배포됐다는 게 꽤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사이버펑크의 사이버사이코였다.


사이버사이코 — 2077에나 올 줄 알았는데

Cyberpunk: Edgerunners

Cyberpunk: Edgerunners © CD Projekt RED / Studio Trigger / Netflix

사이버펑크 2077과 엣지러너스에 나오는 ‘사이버사이코’.

사이버 사이코시스는 신체에 이식된 하드웨어와 행동 개조 부품, 소프트웨어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병적 불안 관련 인격 장애를 종합적으로 일컫는 용어다. 기계에 계속 노출되어 감에 따라 발병자는 자신을 사람보다 기계에 더 동일시하게 된다. 환각이나 환청을 겪으면서 점점 인간성을 잃어간다. 최후엔 이성을 잃고 파괴행위만 반복하게 된다.

작품을 꽤 인상 깊게 보면서 뭐 아무렴 “2077년엔 이런 사회적 문제도 생기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AI Agent의 발전으로 인해 세상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느꼈다.

사이버펑크는 생각보다 일찍 도래했다. 2026 버전 사이버사이코가 이미 보이기 시작했고, 심지어 나조차도 그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사이버사이코화의 증상

마치 기계와 나를 점점 동일시하게 되는 것처럼 AI를 더 이상 도구로 보지 않고, 그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자아를 의탁하게 된다. 내가 느낀 2026 사이버사이코는 다음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

초기

  • 완성도에선 떨어지더라도 생산성을 이길 수 없다. 일단 뽑고, 완성도는 디테일 깎기와 휴먼 터치로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 결과물이 맘에 안 들면 프롬프트가 문제인지, 하네스가 문제인지 파고든다. 새로운 도구와 방법론을 깎는 것에 점점 몰입한다. 방법론을 깎느라, 개발 프로젝트는 이미 하나의 실험장이 되어 있고 결과물은 뭔가 허접하다.

중기

  • 해보지도 않고 “할 수 있다”고 큰 근거 없이 주장하기 시작한다.
  • 정작 시연할 때마다 예상 외로 잘 안 된다.
  • “아, 내 Claude가 그랬어요”를 변명으로 쓰기 시작한다.
  •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 시간이 아까워진다. 그 시간에 토큰을 태우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말기

  • IDE를 지운다. 단 한 줄의 코드도 직접 작성하거나 직접 읽지 않는다.
  • 외부에서 오는 모든 자극을 에이전트에게 passthrough한다.
  • 어떻게 되어 있냐는 질문에 “물어봐야 안다”란 대답이 나온다.
  • 결과가 잘 안 나오는 건 “충분한 맥락과 배경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가진단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 말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과거엔 VSCode를 열고, 전반적인 코드 디자인을 보면서 조금씩 리팩토링하고, 리뷰어를 위해 soft reset 해가며 커밋을 라인 바이 라인으로 다시 쌓아 PR을 넣던 시절이 있었다. 아키텍처 / ERD를 먼저 그려보며 같이 리뷰하고 인터페이스부터 잡아보며 고민을 계속 쌓아가는, 느리지만 단단하게 일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렇게 시간을 들였던 건 결국 미래의 리스크와 잘못된 선택의 기회비용을 줄이려던 거였다. 지금은 그 시간의 가치가 주변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설득력을 갖는지 잘 가늠이 안 된다. 빠르게 발견하고 빠르게 고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등장하면서, 나도 마인드셋이 많이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IDE를 버리고 tmux 기반 터미널 환경으로 옮겼다. 멀티 프로젝트를 돌려가며, 검토를 직접 하기보단, 어떻게 하면 검토를 자동화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프로젝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적으로 에이전트에게 맡기고, 나는 결과물만 리뷰하는 식이다. 이게 과연 올바른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돌아갈 수 없다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 사이버사이코에 대해 이런 설명이 있다:

한번 사이버 사이코시스를 겪은 사람은 예전과 결코 다시는 동일하지 않으며, 이들이 입은 정신적 손상은 성격의 측면을 변화시키고 평생 따라다닌다.

이게 AI Agent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느낀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느낀다.

완치는 없다. 남은 건 이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다.


“코더와 엔지니어의 차이가 뭘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이 시대에서도 개발 직군에게 바라는 역량은 그대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요구사항을 구체화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최소 비용의 최대 효율의 길을 설득력 있게 제안하는 사람. 가설과 계획 / 구현과 실행 / 분석과 피드백하는 사이클을 디자인하고 실행 / 유지보수할 수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어도 항상 수요가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만…

진짜 살기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